《낙서》
오일
2025 · 45.5 × 53 cm
작가 노트
짙은 파랑과 선명한 노랑, 강렬한 빨강이 사선으로 나뉘며 작은 방 하나가 펼쳐진다. 기울어진 노란 의자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 주변으로 화병과 컵, 화분, 나무, 고양이와 새가 장난감처럼 흩어져 있다. 사물들은 실제 크기나 비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놓여 있지만, 서로를 향해 살짝 기울어진 각도와 겹쳐진 색 덕분에 하나의 장면으로 묶인다. 마치 한 번에 쏟아낸 메모처럼, 방 안의 모든 것들이 동시에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다. 곳곳에 쓰인 연두색 글씨와 숫자는 문장으로 완성되지 않은 단어들만 남겨 둔다. ‘tree’, ‘flower’, ‘house’ 같은 단어들은 사물의 이름이자, 화면 위를 떠다니는 낙서가 된다. 붓끝으로 긁어낸 선, 손가락으로 문지른 듯한 흔적, 마른 물감 위에 다시 올린 두꺼운 오일의 층이 겹치면서, 글자와 그림의 경계는 점점 흐려진다. 사물의 윤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단어를 읽고 있고, 글자를 좇다 보면 다시 색과 형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검은 고양이의 형체는 단순하지만, 초록 눈과 하얀 수염, 뻗은 꼬리는 화면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묵직한 시선을 만든다. 반대로 의자 위와 주변에 놓인 분홍 컵, 흰 새, 작은 꽃다발들은 어린 시절의 장난감처럼 가볍고 유연하다. 이 대비는 방 안의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어른의 기억과 아이의 눈높이가 한 화면 안에서 뒤섞여 있음을 암시한다. 이 작품 앞에 서면 관람자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보다, 이미 책상 위에 펼쳐진 공책 한 장을 내려다보는 듯한 위치에 선다. 무엇을 먼저 읽어야 할지, 어느 사물을 먼저 바라봐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그 순간, 낙서는 더 이상 지워질 찌꺼기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언어와 이미지의 첫 형태로 다가온다. 천천히 눈을 옮기다 보면, 관람자는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말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문장 하나를 이 색채 가득한 방 어딘가에 살짝 내려놓게 된다.
김경미scholas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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