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오일
2026 · 45.5 × 53 cm
작가 노트
화면 전체를 채운 연둣빛 초록은 풀잎 하나하나를 구분하기보다, 먼저 하나의 온도와 공기로 다가온다. 앞쪽에는 다양한 녹색의 잎과 줄기들이 겹겹이 올라와 있고, 그 사이로 분홍과 흰색의 둥근 꽃들이 조용히 떠 있다. 잎맥을 세밀하게 따라가기보다, 붓이 한 번씩 꾹꾹 눌리고 스치며 남긴 터치들이 식물의 방향과 기분을 대신한다. 서로 다른 초록이 겹쳐진 자리마다 미세한 그림자가 생기면서, 화면은 빽빽한 숲이 아니라 숨이 잘 통하는 작은 풀밭처럼 펼쳐진다. 중경에는 작은 꽃무리가 네모난 덩어리처럼 서 있고, 그 위를 노란 나비가 가볍게 가로지른다. 화면 왼쪽에는 하얀 새와 새끼 새 두 마리가 나란히 걸어가며, 초록빛 언덕 위 가장자리에는 집과 나무들이 장난감처럼 줄지어 있다. 실제 거리감과 비례를 따르지 않는 이 배치는, 멀리 있는 풍경과 가까운 풀잎을 한 시야 안에 겹쳐 놓으며,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오른 장면들을 한 화면에 붙여 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작은 존재들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지만, 모두 같은 초록의 바닥 위에서 느리게 흐르는 하나의 시간을 공유한다. 오일 물감의 두께는 과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꽃송이와 잎의 끝마다 작은 입자처럼 남아 있어,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은은하게 반짝인다. 가는 선으로 이어진 줄기들은 규칙적인 패턴이 되기보다, 손이 잠시 머물렀다 다시 나아간 호흡의 기록에 가깝다. 화면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집과 새, 나비 같은 구체적인 형상보다는, 초록과 분홍이 섞여 만들어내는 느린 리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작품 앞에 서면 관람자는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기보다, 한낮의 풀밭에 잠시 몸을 기대어 누운 사람에 가까워진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시간, 바람에 흔들리는 잎과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만이 천천히 이어지는 순간 속에서, 마음은 어느새 긴장을 내려놓고 화면의 초록과 같은 속도로 호흡하게 된다. 이 작품이 말하는 ‘쉼’은 어딘가로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휴식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었던 가장 단순한 평온을 다시 기억하는 일에 가깝다.
김경미scholas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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