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모세혈관 (Capillaries of the Mountain)》
아르쉬 종이,수채,종이
2007 · 70 × 99.7 cm
작가 노트
수평으로 길게 누운 산의 실루엣 안쪽을, 수없이 많은 붉은 선과 점이 메우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덩어리였던 붉은 산이 잘게 쪼개져, 서로 얽히고 흐르는 작은 방울과 타원형의 틈들로 분해된다. 이 유기적인 형들은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처럼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타고, 골짜기를 돌아 나가며,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몸의 안쪽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진홍, 주홍, 분홍, 주황이 겹겹이 쌓인 사이사이로 노랑과 연보라, 옅은 파랑이 스며들어 있다. 강렬한 붉은 색이 고통과 상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 사이로 번지는 밝은 색들은 그 상처를 통과해 나오는 숨과 온기를 닮아 있다. 종이의 흰 여백은 피가 지나간 자리이자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가능성처럼 남아, 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모세혈관망으로 만든다. 멀리서 보면 이 이미지는 추상적인 패턴이자 풍경이 되고, 조금 더 바라보면 ‘가시나무’에서 떠올렸던 모세혈관의 나선과, 피가 곧 생명이라는 고백이 겹쳐진다. 산이라는 외부의 자연과 몸 안의 혈관이 하나의 형상으로 겹쳐지면서, 내가 딛고 선 땅과 내 안을 흐르는 생명이 같은 근원에서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 조용히 올라온다. 관람자는 이 붉은 산 앞에서 실제의 지형을 찾기보다,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상처와 회복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눈으로는 풍경을 보고 있지만, 마음은 어느새 자신의 몸 안을 들여다보듯 이 모세혈관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게 되고, 산을 이루는 수많은 작은 선들 사이에서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는 생명의 리듬을 한 번 더 느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