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한 걸음(Step by step)

수채,종이

2007 · 52.8 × 37.8 cm

추상·비구상인물·신체동물·식물·자연

작가 노트

새하얀 여백 위에 한 인물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몸은 살과 근육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붉은 계열의 물감이 만든 그물망 같은 결로만 이루어져 있다. 핑크, 오렌지, 레드, 보라가 얽히며 만들어 낸 유기적인 틈들은, 피부의 표면이라기보다 안쪽의 근섬유와 혈관, 그리고 몸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드러낸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의 자세가 포착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진짜로 움직이는 것은 뼈와 근육이 아니라, 미세하게 진동하는 색의 파동들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이 인물은 하나의 면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 작은 붓 자국과 물감의 번짐이 만든 결의 집합으로 보인다. 구멍처럼 비어 있는 틈 사이로 흰 바탕이 숨을 쉬듯 드러나고, 농도가 다른 레드와 오렌지가 서로를 덮고 스며들며, 마치 세포가 분열하고 재구성되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팔과 다리 쪽으로 갈수록 색의 결은 더 가늘고 길어지며, 앞으로 뻗어 나가려는 힘을 따라 유선형으로 흐른다. 특히 허리와 골반 주변의 진한 남보라와 딥블루는, 몸의 중심을 이루는 무게와, 그 무게를 끌고 한 발을 떼어야 하는 순간의 긴장을 응축한 듯 화면의 심지를 형성한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흰 여백은 인물을 둘러싼 공기이자, 아직 디딜 곳이 채워지지 않은 공간처럼 보인다. 발 아래의 바닥도,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그려져 있지 않지만, 관람자는 이 기울어진 몸의 방향과 리듬을 따라, 보이지 않는 길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떼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한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몸 안에서 조금씩 이동하는 온기와 무게의 감각임을, 색의 결이 조용히 말해 주는 듯하다. 이 앞에 서 있는 동안, 인물은 특정한 누군가의 초상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지탱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모든 몸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관람자는 붉은 그물망 사이를 따라 시선을 천천히 미끄러뜨리며, 자신의 안에서도 어디쯤에서 힘이 모이고, 어느 지점에서 균형이 흔들리며, 또 어떻게 다시 중심을 찾아 한 발을 내딛게 되는지 조용히 떠올리게 된다. 흰 여백 속에 남겨진 이 반투명한 실루엣은, 아직 완전히 도착하지 않은 어떤 존재의 중간 걸음으로, 오래도록 여운처럼 머문다. ※ 소장 완료 (Reference Work)

향설 김현지

“생명의 흐름과 빛의 파동을 회화적 리듬으로 포착하는 동시대 추상 화가” 색과 형태의 반복적 리듬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에너지를 시각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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