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새의사계절

아크릴,모래

2025 · 60.6 × 72.7 cm

작가 노트

화면은 아래의 갈색 갈대밭, 중앙의 호수, 멀리 이어진 보랏빛 산과 하늘이 수평으로 겹쳐지며 하나의 긴 시간대를 이룬다. 가까이 다가가면 아크릴과 모래가 두껍게 쌓인 표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칼날로 긁어올린 듯 거칠게 일어난 물감층은 실제 풍경이라기보다,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기억의 단면처럼 느껴진다. 앞쪽의 갈대는 늦가을의 색을 품고 서 있다. 붉은 갈색, 타는 듯한 오렌지, 옅은 노랑이 빽빽하게 뒤섞이며, 한 계절을 통과해 온 시간의 열기를 간직한 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흔들린다. 그 사이사이에 흩뿌려진 흰 점들은 눈발이자 빛의 잔상처럼 보이며, 이미 끝나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여름의 온기를 떠올리게 한다. 갈대 너머의 호수는 푸른색과 회색, 보랏빛이 겹겹이 번지며 계절을 건너가는 마음의 수면을 닮아 있다. 물결을 따라 붓질이 촘촘하게 이어져, 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감정의 변화가 잔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호수 위로 비친 산의 반영은 현실과 기억, 지금과 지나간 시간이 서로 겹쳐져 있다는 조용한 암시처럼 화면을 가로지른다. 멀리 보랏빛과 분홍빛이 섞인 산능선은 하루의 끝에 맞는 빛을 품고 있다. 차분한 보라와 옅은 청색은 성숙과 돌아봄의 계절을, 그 위로 흩어진 흰 점들은 겨울의 고요와 새로운 시작의 기운을 동시에 전한다. 이 풍경 앞에 서면, 관람자는 갈대밭 가장자리에 서서 호수와 산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자리에 놓인다. 지금 내가 건너고 있는 계절은 어디쯤인지, 지나온 시간의 색은 어떤 빛이었는지, 두텁게 쌓인 물감과 모래의 결을 눈으로 더듬으며 천천히 떠올리게 된다.

김예지

나는 자연을 그리지만, 풍경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파도와 숲, 꽃과 하늘, 그리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빛은 삶의 시간과 마음의 풍경을 상징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스러지고 다시 피어나며, 그 순환 속에서 사랑과 희생, 기다림과 회복의 의미를 품는다. 나의 화면을 채우는 빛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지나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며, 보이지 않는 사랑과 희망이 머무는 자리이다. 두터운 질감과 깊이 있는 색채는 눈앞의 풍경을 넘어 생명의 숨결과 시간의 흔적을 담아낸다. 나는 자연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통해 다시 자연을 바라본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추며 살아가고, 결국 사랑은 생명의 순환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남는다고 믿는다. 나의 작업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삶을 향한 기도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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