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디지털
2002 · 96 × 72 cm
작가 노트
옅은 회색빛 배경 위로 파스텔 색의 선들이 사선으로 휘감기며, 한 인물의 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번져 나갑니다. 디지털 브러시는 연필과 파스텔 사이 어딘가의 질감으로 남아, 한 번에 휘갈긴 듯한 선과 여러 번 덧입힌 흔적이 동시에 보입니다. 화면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옆모습으로 서 있는 여성의 몸이며, 얼굴은 위로 젖혀져 구체적인 표정 대신 목선과 턱의 곡선만이 강조됩니다. 인물 주변의 흰색과 연노랑, 민트색의 결들은 바람이 지나가는 궤적처럼 보이면서, 이 몸이 고정된 조각상이 아니라 지금 막 움직임을 끝낸 직후의 순간임을 암시합니다. 몸을 타고 내려가는 붉은 그물 망사와 꽃무늬, 얇은 비키니 끈은 장식이자 선명한 경계선이 됩니다. 피부색 위에 겹쳐진 이 문양들은 몸을 가리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내지만, 동시에 이 인물이 스스로 선택한 ‘무대 의상’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어깨에서 팔, 허리와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은 사실적인 묘사보다 길게, 과장되게 그려져 있어, 하나의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여성의 몸’이라는 이미지가 상징처럼 추출된 형태로 서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검은 덩어리와 거친 선으로 표현되어, 다른 부분보다 훨씬 거칠고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그 속에서 흰 장식과 작은 체인이 반짝이며, 몸의 화려한 색채와 대조를 이루어 시선을 붙잡습니다. 화면 왼쪽에 손글씨처럼 적힌 글씨는 서명인 동시에, 이 장면이 완결된 서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메모나 스케치에서 시작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관람자는 얼굴이 가려진 이 인물을 통해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기보다, 스스로의 몸에 대해 갖고 있는 상상과 시선을 마주하게 됩니다. 흐릿한 배경과 또렷한 곡선, 부드러운 파스텔과 날카로운 붉은 선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장면은 노출의 이미지라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장식과 자세로 잠시 서 있는 한 사람의 자의식을 비추는 장면으로 다가옵니다. 잠시 화면 속 바람의 결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이 몸이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짚어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